사실 다음 전시회를 죽도록 기다린 건 아니었어요. 바쁘게 살다 보니 한해가 지났고, 우연한 계기로 작가의 다음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죠. 또 예술 현장은 저의 일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전시회 연계 프로그램을 종종 만들곤 하거든요. 그렇다가 좋은 기회로 최기창 작가의 이번 전시회의 토크 프로그램을 함께하자는 갤러리의 연락을 받았어요.
"전시회 제목은요?"
"Spotless Mind에요"
"혹시 제가 작가님의 작업실에 가도 되나요?"
"연락해보세요:)"
그렇게 연락 후 두 번째 전시회 준비가 한창인 작가님의 작업실에 방문했어요. 운이 좋은 관객이 전시장 어딘가에서 동시대 작가를 마주치듯, 적극적인 기획자는 작가의 작업실에 갈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런데 막상 작가의 작업실에 간다고 하니 좀 떨렸어요.
신진 작가들과는 많이 교류해왔지만, 첫 개인전을 2001년에 마친 중견 작가님과의 만남은 처음이었어요. 근데 제가 이런 귀한 만남에서 좀 본전을 뽑는 경향이 있거든요.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을 툭툭 던지면서 이것저것 다 물어보는 스타일이에요.
"사실 저 작가님과 토크 프로그램을 하는게 부담스러워요"
"어 왜요?"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님이시잖아요. 경력이 풍부한 기획자들과 일하고 싶으실 것 같아요."
"안그래요. 작가는요, 내 작업에 호기심을 가진 기획자를 찾아요."
호기심 있는 기획자라... 그렇다면 자신이 있었어요. 작년 <한 번의 키스> 전시회에서 생겨난 수많은 질문이 생각났거든요. 그 질문으로 대화가 출발했고, 저는 우리의 대화 속에서 제가 작년 전시회에서 놓친 아주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발견했어요.
우연.
작업실 벽면에 형형색색의 스프레이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어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지는 흔적들인데요. 이 흔적이 다시 작품이 되는 거예요.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들을 생각해봤어요. 동시에 이 모든 흔적의 조합은 우연에 가깝죠.
우연과 필연으로 범벅이 된 철판 위,
저는 곳곳의 테이프를 직접 벗겨냈어요.
전시회가 열렸고, 작업실에 놓여 있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직접 테이프를 뜯었던 작품부터 전시장 바닥에 놓여 있던 작품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웠던 것은 바로 코뿔소 그림이었어요.
작년, 피에타 작품이 걸려 있는 위치였죠. 사실 작업실에서 코뿔소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어요. 이 이야기가 가장 재밌었거든요. 1500년대 뒤러라는 화가가 있었는데요. 워낙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화가로 유명해서 판화로 많이 보급되곤 했었대요.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면 실제로 그 사물을 봐야 하잖아요. 근데 유일하게 뒤러가 실제로 보지 않고 그린 그림이 이 코뿔소예요.
코뿔소처럼 생긴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코끼리와 비교하며 코뿔소를 열심히 설명했고, 그 설명을 듣고 그린 게 바로 <뒤러의 코뿔소>라는 목판화에요. 얼핏 보면 코뿔소 같아 보이지만 다리는 바다거북의 가죽같고, 등에는 작은 뿔이 있고, 갑옷을 입고 있죠. 코뿔소를 보지 않고 그렸으니 당연히 이건 코뿔소가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300년 넘는 동안 이게 진짜 코뿔소인 줄 알았다고 해요.
그리고 뒤러의 코뿔소를 72배 확대한 최기창의 코뿔소를 바라봤어요. 이 작품 앞에서 비로소 저는 작가가 오랫동안 이야기한 사랑의 대상을 짐작해볼 수 있었어요. 그 대상이 예술이구나.
본 적 없는 코뿔소가 무려 3세기 동안 사랑을 받았다면 뒤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 뒤러의 감정을 작가는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본 적 없는 대상을 그려내고, 그 결과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 앞에 놓이는 경험을 지금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코뿔소가 작가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낸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소장을 결심한 것은 2층에 있는 작품이었답니다. 양 벽면을 수 놓은 그림들. 럭키 드로잉 시리즈에요.
스프레이 흔적들,
부식된 구절들,
약간의 광이 나는 표면.
저는 이 중에서도 '장미빛'이라는 단어가 쓰인 작품을 선택했어요. 사실 컬렉팅을 결심했던 순간은 코뿔소 작품 앞이었어요. 코뿔소의 작품을 소장하겠다가 아닌, 최기창의 작품을 소장해야겠다는 결심에 가까워요. 그래서 저는 어떤 작품으로 할지 고민하다 결국 전시회를 5번이나 방문하게 되었고요.
이 컬렉팅의 기쁨을 정말이지 나누고 싶었어요. 꼭 다음 이야기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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